유리종이 (6화) - 내 갈 곳은 어디인가? 유리종이



오늘은 정말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납품이 끝나면 다음날 하루는 이불 속에서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이 그동안 고생한 몸에 대한 예의라고 여기는 서정은 누워서 핸드폰으로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열 두 시간을 잤는데도 드라마 한 편을 채 보기도 전에 눈이 껌벅껌벅 감겨왔다.

베개의 마법!

머리가 베개에 닿아 있으면 얼마를 잤건 간에 또 잠이 오는 것이 서정이 항상 체험하는 베개의 마법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베개의 마법에 순순히 걸려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눈꺼풀이 원하는 대로 이불 밖의 세상을 차단하고 온 몸에 힘을 쭉 빼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전화벨이 쩌렁쩌렁 울렸다. 서정의 눈이 번쩍 뜨이며 스프링을 단 듯 몸이 튕겨 올라 순식간에 누워 자세에서 앉아 자세로 변신했다. 전화기를 들어 보니 ‘아성박과장’이라고 떠 있었다. 서정은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이거! 쉬시는데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친절한 박 과장’ 평소 서정이 사무실에서 늘 하는 말이었다. 서정의 팀에 일감을 주는 클라이언트 중에 가장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사무실에 방문 할 땐 절대 빈손으로 오는 일이 없고, 중간에 설계 변경이라도 생기면 어찌나 미안해하는지 ‘힘드신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팀원들이 오히려 미안해할 정도로 많이 하는 남자였다.


“아닙니다. 쉬긴요.”


서정은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용건을 말하라는 의미의 멘트를 예의상 던졌다. 박 과장은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며 FTP 주소를 보내 줄 테니 아침에 납품한 최종 영상을 거기에 올려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박 과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박 과장이 보내 준 FTP주소를 사무실에 있는 재국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이 여자가 증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안내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애먼 음성안내서비스에게 짜증을 냈다.


‘재국이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나한테 했군!’



- - - - - - - - - -


‘얘는 자도 전화기는 켜 놓고 자야지.’


사무실에 도착한 서정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손잡이에 넣고 돌렸다.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손바닥만 한 주방과 욕실이 마주보며 만든 네 발짝 짜리 짧은 복도를 지나 작업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서정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엄마!’를 외치며 곧장 뒤로 돌아 실내화를 신은 채로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오른손을 심장 언저리에 얹고 성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재국이 하늘로 치솟은 머리를 한 채 트레이닝 바지와 목 늘어난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천천히 나왔다.


“야!”


서정은 재국을 보자마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에서 이러지 말랬지?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야? 우리 같이 쓰는 사무실이야. 네가 집이 멀어서 여기서 살고는 있지만 처음부터 사무실을 목적으로 우리 돈 합쳐서 구한 거잖아. 처음부터 사무실에서 민망한 짓거리 안하기로 했는데 내 눈에 걸린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너희 둘이 놀고 싶으면 모텔 방 하나 잡아서 얼마든지 놀란 말야. 사무실에서 그러지 말고, 쪼옴!”


말하다 보니 서정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살살 말해. 다른 방 사람들 다 나오겠다.”


실실 웃으며 느긋하게 말하는 재국을 보니 서정은 더 열이 뻗쳤다.


“나한테 그런 모습 보여준 건 안 창피하고 다른 방 사람들이 듣는 건 창피하냐?”


서정은 여전히 험악한 기세로 말했지만 목소리는 아까보다 작아졌다. 그래도 임대료가 저렴한 오피스텔의 문이 방음이 잘 안 되는 탓에 저 쪽에서 누군가 문을 배꼼 열고 이쪽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아마 좀 조용히 하라는 뜻이리라. 재국은 얼른 서정의 팔을 잡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이 끌려 들어오자 안에서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재국의 여자 친구 다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오셨어요.’하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옷은 제대로 차려 입었어도 엉클어진 머리와 부스스한 얼굴이 방금 전까지 잤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세수해라.”


서정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내리누르느라 억눌린 목소리로 낮고 짧게 말하자 다희는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네 발짝 짜리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온 서정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사무실에 널브러진 술병과 시켜먹고 남은 음식들을 보며 서정의 입과 눈이 소리 없이 점점 커졌다. 그와 함께 가슴 속과 머릿속에서 묵직한 것이 점점 커지더니 더 이상 커질 자리가 없어 눈과 뒤통수를 압박하다가 서정의 입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챈 재국이 얼른 서정을 뒤에서 안으며 입을 틀어막고 서정의 폭발을 막았다.


“미안해, 미안해, 서정아! 이건 일어나서 치우려고 했어. 너 오늘 안 오는 줄 알고 아직 안 치운 것뿐이야.”


서정은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재국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서정이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팔꿈치로 재국의 옆구리를 치기위해 팔을 휘두를수록 재국은 더 세게 서정을 압박하며 말했다.


“너 원래 납품 끝나면 하루는 집에서 쉬잖아, 그래서 어제 모처럼 맘 놓고 놀아 봤어. 그동안 잠도 못자고 힘들었잖아. 오늘은 좀 봐주라, 응?”


서정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재국에게서 빠져나가려 했고, 재국은 필사적으로 서정을 봉인하면서, 사무실에서 벌거벗은 채 자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 것과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에 대해 쉴 새 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에서 막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서정은 문득 재국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생각났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흥분해서 잠깐 잊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온 몸의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서정이 얌전해지자 재국은 서정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과 입을 틀어막았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서정이 갑자기 돌변할 상황에 대비해 아주 천천히 두 팔을 거둬들였다. 온 힘을 다해 몸부림 친 나머지 서 있을 기력도 없어진 서정은 옆에 있던 사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 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대단히 불길한 느낌으로 뒤를 돌아 본 서정은 경악했다. 의자에 컵라면이 찌그러진 채 누워있었다. 먹다 만 퉁퉁 불은 라면이 덩어리가 되어 쓰러진 컵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고, 다 식어서 허연 기름이 떠다니는 라면 국물이 컵 안에서부터 나와 의자 바닥을 거쳐 사무실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리를 돌려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재빨리 일어난 덕분에 바지가 많이 젖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엉덩이 아래부터 허벅지까지 라면 국물이 묻어있었다. 갑자기 정수리가 뜨거워짐을 느낀 서정은 미간에 내천 자 주름을 만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수리의 뜨거운 것이 이마로 눈으로 내려왔다. 심장에서도 정수리 못지않게 뜨거운 것이 팔딱팔딱 뛰었다. 서정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 새 왔는지 재국의 여자 친구가 의자 위를 치우고 휴지로 꾹꾹 눌러서 의자 속으로 스며든 라면 국물을 짜내고 있었다. 재국은 벌개진 서정의 얼굴을 보며 아까의 서정처럼 눈이 점점 커졌다.


“어, 어, 어! 서정아, 심호흡! 혈압, 혈압! 너희 집 혈압이 높잖아. 천천히, 천천히 숨 쉬어.”


서정의 얼굴색이 변한 것을 보고 대단히 당황한 재국은 이러다 서정이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도 생각나는 말이라곤 ‘천천히’와 ‘숨 쉬어’ 뿐이었다. 두 마디만 반복하던 재국의 머릿속에 새로운 단어가 떠올랐다.


“경우! 경우한테 전화 할까?”


경우라면 서정의 혈압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국은 핸드폰을 찾으려 했다.


“됐어.”


서정이 낮고 짧게 말했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는 핏줄기를 꾹 눌러 내리는 것 같은 무거운 목소리였다. 핸드폰을 찾으려던 재국은 움직임을 멈추고 서정의 얼굴만 가만히 관찰했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서정의 얼굴색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재국의 질린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다.


“이건 아닌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