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종이 (6화) - 내 갈 곳은 어디인가? 유리종이



오늘은 정말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납품이 끝나면 다음날 하루는 이불 속에서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것이 그동안 고생한 몸에 대한 예의라고 여기는 서정은 누워서 핸드폰으로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열 두 시간을 잤는데도 드라마 한 편을 채 보기도 전에 눈이 껌벅껌벅 감겨왔다.

베개의 마법!

머리가 베개에 닿아 있으면 얼마를 잤건 간에 또 잠이 오는 것이 서정이 항상 체험하는 베개의 마법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베개의 마법에 순순히 걸려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눈꺼풀이 원하는 대로 이불 밖의 세상을 차단하고 온 몸에 힘을 쭉 빼자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동시에 전화벨이 쩌렁쩌렁 울렸다. 서정의 눈이 번쩍 뜨이며 스프링을 단 듯 몸이 튕겨 올라 순식간에 누워 자세에서 앉아 자세로 변신했다. 전화기를 들어 보니 ‘아성박과장’이라고 떠 있었다. 서정은 헛기침을 몇 번 해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이거! 쉬시는데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친절한 박 과장’ 평소 서정이 사무실에서 늘 하는 말이었다. 서정의 팀에 일감을 주는 클라이언트 중에 가장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사무실에 방문 할 땐 절대 빈손으로 오는 일이 없고, 중간에 설계 변경이라도 생기면 어찌나 미안해하는지 ‘힘드신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팀원들이 오히려 미안해할 정도로 많이 하는 남자였다.


“아닙니다. 쉬긴요.”


서정은 쉬지 않고 일하고 있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용건을 말하라는 의미의 멘트를 예의상 던졌다. 박 과장은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며 FTP 주소를 보내 줄 테니 아침에 납품한 최종 영상을 거기에 올려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박 과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박 과장이 보내 준 FTP주소를 사무실에 있는 재국에게 전달하고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이 여자가 증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안내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애먼 음성안내서비스에게 짜증을 냈다.


‘재국이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나한테 했군!’



- - - - - - - - - -


‘얘는 자도 전화기는 켜 놓고 자야지.’


사무실에 도착한 서정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손잡이에 넣고 돌렸다.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손바닥만 한 주방과 욕실이 마주보며 만든 네 발짝 짜리 짧은 복도를 지나 작업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서정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엄마!’를 외치며 곧장 뒤로 돌아 실내화를 신은 채로 문 밖으로 뛰어나왔다. 오른손을 심장 언저리에 얹고 성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재국이 하늘로 치솟은 머리를 한 채 트레이닝 바지와 목 늘어난 헐렁한 반팔 티를 입고 천천히 나왔다.


“야!”


서정은 재국을 보자마자 냅다 소리를 질렀다.


“사무실에서 이러지 말랬지? 여기가 너 혼자 사는 집이야? 우리 같이 쓰는 사무실이야. 네가 집이 멀어서 여기서 살고는 있지만 처음부터 사무실을 목적으로 우리 돈 합쳐서 구한 거잖아. 처음부터 사무실에서 민망한 짓거리 안하기로 했는데 내 눈에 걸린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너희 둘이 놀고 싶으면 모텔 방 하나 잡아서 얼마든지 놀란 말야. 사무실에서 그러지 말고, 쪼옴!”


말하다 보니 서정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살살 말해. 다른 방 사람들 다 나오겠다.”


실실 웃으며 느긋하게 말하는 재국을 보니 서정은 더 열이 뻗쳤다.


“나한테 그런 모습 보여준 건 안 창피하고 다른 방 사람들이 듣는 건 창피하냐?”


서정은 여전히 험악한 기세로 말했지만 목소리는 아까보다 작아졌다. 그래도 임대료가 저렴한 오피스텔의 문이 방음이 잘 안 되는 탓에 저 쪽에서 누군가 문을 배꼼 열고 이쪽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아마 좀 조용히 하라는 뜻이리라. 재국은 얼른 서정의 팔을 잡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정이 끌려 들어오자 안에서는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재국의 여자 친구 다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오셨어요.’하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옷은 제대로 차려 입었어도 엉클어진 머리와 부스스한 얼굴이 방금 전까지 잤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세수해라.”


서정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내리누르느라 억눌린 목소리로 낮고 짧게 말하자 다희는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네 발짝 짜리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들어온 서정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사무실에 널브러진 술병과 시켜먹고 남은 음식들을 보며 서정의 입과 눈이 소리 없이 점점 커졌다. 그와 함께 가슴 속과 머릿속에서 묵직한 것이 점점 커지더니 더 이상 커질 자리가 없어 눈과 뒤통수를 압박하다가 서정의 입으로 터져 나오려 했다. 불길한 낌새를 알아챈 재국이 얼른 서정을 뒤에서 안으며 입을 틀어막고 서정의 폭발을 막았다.


“미안해, 미안해, 서정아! 이건 일어나서 치우려고 했어. 너 오늘 안 오는 줄 알고 아직 안 치운 것뿐이야.”


서정은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재국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서정이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팔꿈치로 재국의 옆구리를 치기위해 팔을 휘두를수록 재국은 더 세게 서정을 압박하며 말했다.


“너 원래 납품 끝나면 하루는 집에서 쉬잖아, 그래서 어제 모처럼 맘 놓고 놀아 봤어. 그동안 잠도 못자고 힘들었잖아. 오늘은 좀 봐주라, 응?”


서정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재국에게서 빠져나가려 했고, 재국은 필사적으로 서정을 봉인하면서, 사무실에서 벌거벗은 채 자고 있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준 것과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에 대해 쉴 새 없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에서 막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던 서정은 문득 재국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생각났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흥분해서 잠깐 잊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온 몸의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서정이 얌전해지자 재국은 서정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과 입을 틀어막았던 손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서정이 갑자기 돌변할 상황에 대비해 아주 천천히 두 팔을 거둬들였다. 온 힘을 다해 몸부림 친 나머지 서 있을 기력도 없어진 서정은 옆에 있던 사무용 의자에 털썩 앉았다 …… 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대단히 불길한 느낌으로 뒤를 돌아 본 서정은 경악했다. 의자에 컵라면이 찌그러진 채 누워있었다. 먹다 만 퉁퉁 불은 라면이 덩어리가 되어 쓰러진 컵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고, 다 식어서 허연 기름이 떠다니는 라면 국물이 컵 안에서부터 나와 의자 바닥을 거쳐 사무실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리를 돌려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재빨리 일어난 덕분에 바지가 많이 젖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엉덩이 아래부터 허벅지까지 라면 국물이 묻어있었다. 갑자기 정수리가 뜨거워짐을 느낀 서정은 미간에 내천 자 주름을 만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수리의 뜨거운 것이 이마로 눈으로 내려왔다. 심장에서도 정수리 못지않게 뜨거운 것이 팔딱팔딱 뛰었다. 서정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 새 왔는지 재국의 여자 친구가 의자 위를 치우고 휴지로 꾹꾹 눌러서 의자 속으로 스며든 라면 국물을 짜내고 있었다. 재국은 벌개진 서정의 얼굴을 보며 아까의 서정처럼 눈이 점점 커졌다.


“어, 어, 어! 서정아, 심호흡! 혈압, 혈압! 너희 집 혈압이 높잖아. 천천히, 천천히 숨 쉬어.”


서정의 얼굴색이 변한 것을 보고 대단히 당황한 재국은 이러다 서정이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을 만한 말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도 생각나는 말이라곤 ‘천천히’와 ‘숨 쉬어’ 뿐이었다. 두 마디만 반복하던 재국의 머릿속에 새로운 단어가 떠올랐다.


“경우! 경우한테 전화 할까?”


경우라면 서정의 혈압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국은 핸드폰을 찾으려 했다.


“됐어.”


서정이 낮고 짧게 말했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려는 핏줄기를 꾹 눌러 내리는 것 같은 무거운 목소리였다. 핸드폰을 찾으려던 재국은 움직임을 멈추고 서정의 얼굴만 가만히 관찰했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서정의 얼굴색이 점점 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재국의 질린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다.


“이건 아닌 거 같아.”


유리종이 (5화) - 과거 이야기 유리종이

[ 14년 전 ]


2월의 하늘은 너무나 어두웠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를 하루 앞두고 서정은 학교에서 가까운 번화가를 헤매고 있었다. 아직 6시도 안됐는데 벌써 어둑어둑 해지고 있었다. 바람은 또 왜 그렇게 부는지……. 머리카락이 갈 곳을 잃고 눈앞을 가렸다가 뒤로 획 도망갔다가 참 요란하게도 얼굴을 때려댔다. 가끔씩 앞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면 서정은 콧구멍 속으로 휘몰아쳐 들어온 찬 기운에 놀라 잠깐씩 뒤로 돌아야 했다. 목도리로 코와 입을 감싸고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꼭 눌렀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춥고, 하늘도 어둡고 마음도 어두웠다. 이대로 바람에 휘익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서정을 떠밀어 올려 뱅글뱅글 돌려서 아무도 모르는 먼 곳으로 던져줬으면 싶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빨간 구두를 신고 노란 벽돌 길을 따라가다가 강철 오빠를 찾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엥?’


이 와중에 왜 또 강철을 생각하고 있는지 참 한심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무도 서정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괜히 혼자 부끄러웠다.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강철을 떨쳐버리려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퇴근시간 전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가 한산한 데에는 서정을 괴롭히고 있는 이 칼바람도 한 몫 하고 있었다. 학교는 번화가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 떨어진 인적 드문 작은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라 해도 그곳에 자리한 대학교 덕분에 식당, 분식점, 화방, 커피숍, 술집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비록 규모도 작고 초라했지만 학교 근처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정은 이 동네에 올 일이 거의 없어서 동네가 낯설었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한 탓에 아침을 못 먹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슬픔 속에 잠겨있느라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 본 순간 갑자기 허기가 몰아쳤다. 하지만 지금은 뱃속을 달래 줄 식당 보다는 마음을 달래 줄 술집이 필요했다.

두리번거리는 서정의 눈에 ‘이 경우…’라고 씌어 있는 간판이 보였다. 간판 아래에 있는 그림들을 보니 맥주 집이 틀림없었다. 일단 겉보기엔 깔끔한 게 마음에 들었다. 더 마음에 든 건 간판이었다.


‘‘이 경우......’ 이런 경우엔 여기로 들어오라는 얘긴가? 지금의 나처럼 술도 필요하고 요기할 거리도 필요한 경우?’


서정은 자기도 모르게 힘없는 웃음을 피식 내보냈다. 같은 과 친구 이름이랑 똑같아서였다.


‘걘 지금 뭐하나? 아르바이트 하려나, 이경우?’


서정은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 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서서 잠깐 둘러보니 두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다. 서정은 제일 안쪽 구석진 자리로 갔다. 칸막이가 낮았지만 두 면이 벽으로 막혀 있어서 아늑했다. 고양이처럼 작은 상자에 들어가 세상과 격리되고 싶었던 서정에게 그런대로 알맞은 자리였다. 칸막이를 등지고 벽을 향해 앉아있던 서정은 직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받아들며 자연스레 직원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서정이 눈길을 준 그곳은 직원의 가슴께였다. 서정은 속으로 ‘이 사람 키가 참 크네!’라고 생각하며 메뉴를 대충 훑어보고는 주문하기 위해 직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서정을 보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덩치도 우람하지만 뚱뚱하지는 않은 체구를 가진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경우!”


서정이 놀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경우가 말했다.


“너 들어오는 거 보고 따라왔지.”


“너 여기서 알바 하는 거야?”


“응, 잘 지냈어?”


“그럭저럭…….”


서정은 간판을 생각하고 손가락으로 입구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이 경우…’가.”


서정은 손가락을 옮겨 경우를 향했다.


“이 ‘이경우’야?”


서정이 놀란 눈으로 묻자 경우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빠 작명 센스야.”


“아아, 너희 아빠 가게구나!”


서정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방학인데 여긴 웬일이야?”


경우가 묻자 서정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어……, 그냥. 어디 좀 갔다가 집에 가는 길에 들렀어.”


실은 새벽부터 강철을 만나러 갔다가 충격과 슬픔만 가득 안은 채 집에 가기는 싫고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온 것이었다.


“누구 만나기로 했어?”


술집에 여자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경우가 물었다.


“아니.”


“너……, 무슨 일 있어?”


서정의 짧은 대답에 놀란 경우가 물었다.


“아니,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는데, 너희 집에 뭐 배부를 만한 거 없어?”


서정에게 무슨 일이 있긴 한데 말하기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자 경우는 더 묻지 않고 대답했다.


“날도 추운데 어묵탕 줄까? 칼칼하게.”


“호프집에 어묵탕도 다 있네.”


“우리 소주도 팔아.”


따뜻한 실내에서 몸이 녹자 서정의 허기는 더 심해졌다.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경우의 추천 메뉴를 먹기로 했다. 어묵탕이 나오는 데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경우는 시키지도 않은 공기밥도 한 그릇 가져왔다. 서비스라고 하면서…….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탕을 한 숟갈 떠먹자 목구멍에서부터 식도를 타고 쭉 내려가는 뜨끈하고 매콤한 기운에 서정은 뒷덜미에서부터 등줄기를 타고 허리까지 녹아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긴장이 확 풀어졌다. 가게 안에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퇴근자들이 하루의 피로를 풀고 회포도 풀러 술집으로 모여드는 소리였다. 경우와 다른 직원들도 바빠졌다. 덕분에 서정은 구석진 자리에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편하게 고독을 즐겼다. 밥그릇을 다 비우고 맥주잔도 비우자 어떻게 알았는지 경우가 왔다.


“더 마실 거야?”


“나…… 소주…….”


“소주?”


“배불러서 맥주 못 마시겠어.”


경우는 빈 그릇과 빈 술잔 그리고 탕을 데워준다며 반쯤 남은 뚝배기까지 가져갔다. 잠시 후, 경우는 다시 생명을 얻어 보글보글 춤을 추는 어묵탕이 가득한 뚝배기와 소주병과 소주잔을 가져와 서정 앞에 내려놓고는 소주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첫 잔이니까 내가 따라줄게.”


경우는 소주 한 잔을 따라 주더니 또 가버렸다. 서정은 눈으로 경우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가게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잘 되네, 이 집!”




두 번째 소주병이 반쯤 남아 있는 게 어른어른 보였다. 서정은 저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울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뱃속이 슬슬 울렁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 맥주 500cc에다가 소주가 한 병 반이면......


‘넘었네, 넘었어!’


자신의 주량을 훨씬 넘게 마셨다는 생각이 들자 피식하는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술이 술술 잘 넘어가는 날이구나!’


서정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앉았다기 보다는 반쯤 누운 모습으로 가만히 있자 경우가 다가와 서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야, 문서정! 자는 거야?”


경우의 물음에 서정이 천천히 대답했다.


“깨우지 마.”


“이제 청소 끝내고 너랑 한 잔 하려고 왔더니 이게 뭐야? 정신 차려, 문서정!”


경우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웃는 표정으로 서정을 다그치자 서정은 ‘으이쌰!’하며 등받이에 기대 누웠던 몸을 바로 세웠다. 소주병을 든 채 탁자 위를 두리번두리번 찾던 서정이 말했다.


“술잔이 없네.”


경우에게 술을 따라 주려던 서정은 경우의 술잔이 안 보이자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다리 위에 올려놓고 눈을 끔뻑끔뻑 거렸다.


“졸려?”


경우가 물었다.


“울 엄마 닮아서 그래.”


“뭐?”


영 엉뚱한 대답이 돌아오자 경우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경우의 눈에는 술 취한 서정의 모습이 꽤 재미있는 것 같았다.


“울 엄마가 술 많이 마시면 자.”


경우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엄마가 술을 많이 마시면 자는 버릇이 있는데 그걸 서정이 닮았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시면 누구나 잠이 오는 거 아닌가? 경우는 서정의 말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우습냐?”


서정이 기분 나쁘다는 투로 물었다.


“아니, 아니. 우스운 게 아니라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


서정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 이 인간이 나를 술 취한 여자 취급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기분은 나빴다.


“정말로 너 귀여워, 진짜야!”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서정을 달래기 위해 경우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너 원래 평소에도 귀여운데 술 취하니까 더 귀여워, 정말이야.”


경우는 정색하며 말했다. 절대로 서정을 놀리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진짜야?”


서정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응, 진짜야. 내가 평소에도 친구들한테 말했었어. 서정이 너 귀엽다고. 못 믿겠으면 전화해서 물어봐.”


경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서정은 믿기로 했다.


‘내가 귀엽대.’


이 순간 서정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다시는 생각 안한다고 오늘 하루 종일 다짐했건만 이놈의 뇌는 까마귀 고기를 쳐드셨는지 또 그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서정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경우가 당황해서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정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서정아, 왜 그래? 귀엽단 말이 기분 나빴어? 미안해, 미안해. 취소할게. 울지 마.”


경우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귀엽단 말이 그렇게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한테 한 번도 그런 말 안했어.”


서정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내렸다.


다른 남자는 이렇게 쉽게 얘기하는데 서정이 그렇게 원하던 강철의 입에서는 ‘귀엽다, 예쁘다’라는 말 아니, 그 비슷한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은커녕 오늘은 ‘이제 오지 마.’라는 말까지 했다. 작년 가을, 얼굴값 못하는 발연기라는 혹평을 받으며 조용히 입대했던 강철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런 대중의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까, 그것도 힘든 군대에서…….’


몇 개월 그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었던 서정은 연인들의 날 밸런타인데이를 하루 앞두고 자그마한 하트 초콜릿을 만들어 아르바이트도 하루 빠지고 그 먼 곳까지 강철을 찾아갔었다. 강철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강철의 그런 표정을 보는 순간 준비 해갔던 말들이 모두 머릿속에서 빠져나갔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말라고, 첫 작품에서 그 정도면 앞으로 가능성이 무궁무진 하다고, 나에게 강철 오빤 영원한 슈퍼스타라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철을 보고 머릿속이 하얘져버린 서정은 내일이 밸런타인데이라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 왔다며 어색함과 긴장감에 허둥지둥 이말 저말 늘어놓다가 얼떨결에 좋아한다는 말까지 툭 내뱉어 버렸다. 그러고는 그 말을 들은 강철보다 말한 당사자가 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보다 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정은 당황한 눈을 강철에게 고정시킨 채 얼어버렸고 강철도 놀랐는지 큰 눈이 더 커진 채 굳어있었다. 그 대로 10년이 흐른 것 같았다. 강철이 말했다. 뭔가 많이 얘기한 것 같았는데 서정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뻐끔거리는 강철의 입반 보였다. 서정의 기억에는 마지막 말만 남았다.


⌜…… 이제 오지 마.⌟


‘내가 그 정도로 최악이야?’하고 경우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대신 눈물이 한 번 더 흘러내렸다. 당황한 경우는 냅킨을 몇 장 뽑아서 서정의 얼굴에 톡톡 찍었다. 화장이 지워질까봐 닦아주지 못하고 눈물을 찍었는데 서정이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쳤다. 마스카라가 양 옆으로 번졌다. 경우는 얼른 냅킨으로 번진 마스카라를 닦아주려 했다. 그러자 서정이 경우의 손을 밀치고 제 손으로 눈물과 마스카라가 번진 곳을 쓱쓱 닦았다. 서정은 마스카라가 옆으로 번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눈물을 닦기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더 처참해졌다. 경우는 서정에게 뭔가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었다. 여자들은 저런 모습 남자에게 보이기 싫어할 텐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면 서정이 얼마나 창피해 할까 생각하며 이 순간을 영원히 가슴속에 묻어둘 것이라 다짐했다.


“얘기 안 해서 미안해. 근데 어떻게 귀엽단 말을 네 면전에서 할 수가 있냐?”


서정이 강철을 생각하며 혼자 중얼거린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경우가 말했다. 서정은 경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이 안 됐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얘가 취했나 싶었다. 그리고 잠이 계속 쏟아졌다. 왠지 지금 앉아있는 긴 의자가 참 푹신해 보였다. 경우가 계속 떠드는데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별로 알아듣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고단했던 오늘 하루를 접어서 과거 속으로 묻어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기위해 먼저 의자와 하나가 되었다. 서정이 갑자기 의자에 스르르 누워버리자 경우는 놀라 얼른 서정을 일으켜 앉혔다. 덩치가 산만한 경우에게 서정은 강아지처럼 가볍게 앉혀졌다. 경우는 여기서 자면 안 된다고, 서정은 제발 자게 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서정이 가방에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야?”


“숙박비.”


서정이 다시 누웠다. 경우는 리본과 포장지를 조심조심 풀어 상자를 열었다. 손바닥만 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에 ‘Happy Valentine’이라고 양각으로 써 있었다. 경우는 이제야 서정이 왜 이러는 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걸 주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서정이가 차였군!’


이 귀여운 아이를 어느 고마운 분이 찼을까 생각했다. 서정은 경우가 평소에 눈여겨보던 여자였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에게 서정이 괜찮지 않냐고 말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가끔 조별 과제를 할 때 같은 조가 되고 싶었지만 머뭇거리다가 항상 다른 친구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서정은 과제 할 때 인기가 많았다. 수석으로 입학해서 지금까지 전액 장학금을 탔으니까. 친구들이 좀 적극적으로 대시해보라고 했지만 자기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서정에게 다가서기가 영 쉽지 않았다. 경우의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었다. 서정을 만난 지 일 년이 다돼 가도록 서로의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던 차에 우연히 서정이 이 공간에 들어와 있다는 게 경우에겐 커다란 선물로 느껴졌다. 서정이 건네준 초콜릿도 기뻤다. 다른 남자에게 퇴짜 맞은 초콜릿이라는 불쾌감도 전혀 없었다. 내가 바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바보라고 해도 좋았다. 지난 일 년 동안 바라만 봤던 서정이 옆에 있으니까.


“이 초콜릿 정말 내 거야?”


“음.”


잠에 취한 서정이 겨우 대답했다. 밸런타인데이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거랬다.


“너 나한테 고백 한 거다?”


서정이 피시식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고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내가 문서정 남자 친구다?”


“음.”


서정이 대답했다. 정신이 있긴 한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남자친구로서 첫 임무를 수행하겠다. 내 여자를 무사히 집으로 귀가 시킨다. 실시!”


경우는 냅킨을 적셔 서정의 처참한 얼굴부터 수습했다. 대충 정리가 되 보이자 서정을 번쩍 안아 차에 태웠다. 가게 문 닫은 후까지 서정이 있을 것 같아서 차를 미리 아빠에게 빌려 놓았었다. 경우의 아빠는 바빠지기 전에 저녁으로 먹으려고 끓이던 어묵탕을 아들이 홀랑 가져간 것에 화가 났다가 어묵탕을 차지한 사람이 아들을 찾아 온 여자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를 빌려 주었다. 오늘은 안 들어와도 된다는 말과 함께…….


서정이 잠결에 횡설수설 하는 바람에 경우는 밤새 서정의 동네를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저 앞에 청소차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차 안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넘었다. 여름이었으면 동이 틀 시간……. 이젠 이 동네 위성지도가 경우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질 정도였다. 드디어 서정의 집 문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서정의 아빠가 마침 출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대문을 연 아빠는 문 앞에 인사불성의 딸을 안고 서 있는 거구의 청년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경우가 서정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서정의 엄마는 까무러칠 뻔했다. 문 밖의 소동에 비몽사몽간에 나온 서윤도 둘의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났다. 서정의 남자친구를 처음 본 날 가족들은 머릿속에 폭풍이 일었다. 경우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서정만 모르고 있었다.




[ 3개월 전 ]


다예의 눈앞에 ‘이스트엔터테인먼트’ 사옥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몇 년간 엄마와 싸워가며 몰래몰래 일궈왔던 다예의 꿈을 이뤄줄 곳이었다. 다예는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절박한 그녀의 꿈을 이뤄줄 건물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디뎠다. 건물이 점점 다가올수록 며칠 전 이스트로부터 온라인 오디션 합격 메일을 받았을 때의 감격이 가슴속에서 증폭되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방망이질했다. 오늘 심사위원들 앞에서 제 천재성을 맘껏 뽐내고 엄마 앞에 가수 한다예로 당당하게 서리라 다짐했다.

드디어 건물 앞에 다다른 다예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입구에 있는 첫 번째 계단을 밟았다. 정문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그저 정문 앞의 계단을 한발 디뎠을 뿐인데 다예의 가슴은 말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두 번째 계단을 밟기 위해 다른 한 발을 들었다. 그리고 다예의 두 다리가 모두 들렸다. 다예의 두 다리는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놀란 다예는 양 팔을 끼고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악! 삼촌, 오빠, 삼촌, 삼촌, 오빠 안 돼! 이거……, 아니. 그게…….”


당황하고 황당한 다예의 입에선 미처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두서없이 흘러나왔고, 다예의 두 발은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다예를 양쪽에서 끼고 있던 삼촌과 오빠는 표정 없는 얼굴로 키 작은 다예를 덜렁 들고 그녀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삼촌과 오빠가 타고 왔던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내던져진 다예는 반대쪽 문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한쪽 팔이 삼촌에게 잡혀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삼촌! 나 오늘 꼭 저기 가야된단 말이야. 오디션 합격했다고 메일 왔어, 진짜야. 내가 보여줄게.”


다예는 핸드폰을 꺼내 메일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삼촌은 다예에겐 눈길도 안 주고 운전석에 탄 오빠에게 말했다.


“상진아, 출발해라.”


“예, 형님!”


상진은 가속페달을 밟았다.


“아악! 이 나쁜 삼촌아! 이 문어 대가리, 석봉이 무식한 조폭…….”


다예는 제가 할 수 있는 온갖 나쁜 말을 내뱉으며 자유로운 한 손으로 석봉을 마구 때렸지만, 석봉은 자신을 구타하는 다예의 작은 손마저도 결박하고 앞만 보고 앉아있었다.




[ 1주일 전 ]


3월의 초저녁은 춥고 어두웠다. 아직 오후 6시도 되지 않았는데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교복 위에 두툼한 롱패딩을 입고 책가방을 멘 여학생이 대문 앞의 벨을 눌렀다. 대문은 요란한 양각 조각이 되어 있어 대문만 봐도 대단한 부잣집이라는 게 보였다. 대문 위와 그 옆으로 이어진 담장에는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학생이 벨을 누르자 안에서는 ‘누구세요?’라는 물음도 없이 대문이 철컹하며 열렸다. 여학생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여학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빈아!”


예빈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고는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지며 놀랐다.


“다예 언니! 무슨 일 있었어? 왜 오늘 학교에 안 나왔어?”


다예는 예빈의 손을 잡았다.


“나 가출했어. 오늘은 너네 집에서 좀 재워주라.”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다예를 보며 예빈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혹시, 오늘 학교 끝나고 나오면서 우리 삼촌 봤어?”


다예는 석봉이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궁금해 물었다.


“언니 오늘 결석한 거 선생님이 언니네 엄마한테 전화 했을 텐데, 삼촌이 있을 리가 있겠어?”


예빈은 당연한 걸 뭐하러 묻냐는 투로 대답했다.


“일단, 들어가자.”


예빈은 이 저녁에 갈 곳 없는 다예를 데리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예빈이 앞서 들어가고 다예가 따라 들어가려는 순간 다예의 몸이 덜렁 들리면서 예빈의 손을 놓쳤다. 예빈은 놀라 다예를 돌아보았다.


“아악! 삼촌, 안 돼. 오빠, 삼촌, 삼촌……!”


다예는 자신의 양 팔을 끼고 번쩍 들고 있는 석봉과 상진에게 소리 지르며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쳤지만 헛된 몸부림이었다.


예빈은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국요괴대백과, 한국 괴물 백과 신변잡기

거의 석 달을 기다려 온 책이 드디어 왔다.

한국요괴대백과 상, 중, 아트북, 삼두일족응 열쇠고리, 부적 스티커 두 세트

늘어놓고 기념사진 똿!


아트북

아트북은 그림 그리는 파괴왕을 위해 일부러 무리해서 산 건데 정작 파괴왕은 별 관심이 없다.


본책 내부


삼두일족응 열쇠고리와 부적 스티커

부적은 요괴의 악행과 장난을 맞는 부적.
삼두일족응은 악한 요괴들의 해악을 막는단다.


아, 뿌듯해!


지난 2월에 샀던 '한국 괴물 백과'와 나란히 꽂아놨다. ㅎㅎㅎ




유리종이 (4화) - 과거 이야기 유리종이



서정과 서윤이 입학하던 날 모두가 잠든 캄캄한 밤에 엄마는 혼자 소주를 홀짝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야?”

서민이 화장실에 들어가려다 화장실 불빛에 비친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는 손바닥으로 얼른 눈물을 닦았다. 화장실 불을 켜 놓은 채 서민이 엄마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엄마의 등이 참 작게 느껴졌다. 그 작은 등이 서민의 그림자로 다 가려졌다. 서민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엄마의 숙인 머리 옆으로 반쯤 마신 소주병과 빈 술잔이 보였다.

“왜 불도 안 켜고 안주도 없이 혼자 술을 마셔.”

엄마의 머리위로 아들의 지청구가 떨어졌다.

“잠깐만!”

서민은 얼른 화장실에 들어갔다. 뒤에서 들리는 서민의 오줌 누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피식 웃었다.

“문이나 좀 닫고 싸지.”

혼자 중얼거리며 웃는 바람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엄마는 또 손바닥으로 얼른 눈물을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서민이 냉장고 문을 열어서 뒤적뒤적 안주 거리를 찾았다.

“그냥 김치나 가져와.”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놈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흘러나와버렸다.

“어? 햄이다!”

서민은 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냉장고에서 햄을 발견했다고 좋아했다. 곧바로 프라이팬을 꺼내 햄을 썰어서 데쳤다.

“소주도 독한데 무슨 김치야. 단백질 정도는 먹어줘야 속이 버티지.”

냄비받침과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며 서민이 말했다. 젓가락과 빈 소주잔까지 들고 온 서민은 엄마 앞에 앉아 엄마의 잔에 소주를 채우고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엄마는 말없이 서민의 잔을 채웠다.

“엄마!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일 군대 간다고 우는 거야?”

서민은 엄마가 왜 우는지 알고 있었다. 엄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 참! 다른 집 아들들도 다 군대 가는데 뭐 대단하다고 울고 그래. 자, 자!”

서민은 엄마에게 잔을 내밀었다. 엄마도 잔을 내밀어 서민의 잔에 부딪혔다.

“다른 집 엄마들도 다 울어.”

수엄마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촉촉이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쳐든 엄마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에헤이! 우리 엄마 터졌네 터졌어.”

서민은 옆에 있던 마른 걸레를 엄마 얼굴에 가져다 댔다. 엄마가 얼굴을 피하며 웃었다.

“야! 그거 걸레야.”

말하는 동안에도 웃는 동안에도 엄마의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어두운 거실 겸 부엌에 스며든 화장실 불빛에 엄마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잠깐씩 반짝였다.

“엄마, 이건 비밀인데......”

서민이 조용히 말을 꺼내자 엄마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서민을 쳐다봤다.

“울다가 웃으면 참 민망한 곳에 털 난대.”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가 얼른 소리를 죽이고 서민의 어깨를 주먹으로 투덕투덕 때렸다. 소리는 죽였지만 입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흘렀다. 뭐가 저렇게 미안해서 끊임없이 눈물이 흐를까. 서민은 엄마의 눈물 속에서 동생들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는 군대 가는 아들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는 걸, 하고 싶은 공부도 제대로 못하는 딸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해서 우는 것이라는 걸 서민은 그 눈물을 보고 읽을 수 있었다. 서민은 엄마의 잔을 계속 채워주었다.

엄마의 눈물이 술로 희석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희석시킬 수 없는 눈물이라면 차라리 확 쏟아내서 말라버리라고, 엄마가 편하게 울라고 서민은 일부러 불을 켜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더 꺼내어 또 엄마와 잔을 기울였다. 이럴 때나 아들이랑 술 마셔보지 언제 또 마셔보겠냐며 그만 마시겠다는 엄마에게 계속 술을 권했다. 두 번째 병이 반쯤 비었을 무렵 엄마는 그 자리에 누웠다. ‘내일 같이 훈련소에 못 가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드러눕더니 이내 코를 골았다. 서민은 엄마를 안아 안방에서 주무시는 아빠 옆에 살짝 눕혀드렸다. 인기척에 잠이 깬 아빠가 무슨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엄마가 술 마셨다는 내용의 말을 몸짓으로 전하자 아빠는 이해했다는 듯이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서민에게 어서 들어가 자라고 손짓했다.

다음 날 새벽, 서민을 배웅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두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엄마만 빼고…….

아빠는 교대근무를 하러 새벽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서민과 함께 대문 밖을 나섰다. 아들을 혼자 보내기 못내 미안했던 아빠가 말했다.

“이놈의 경비라는 게 일이 생겨도 잠깐 대신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괜찮아요. 지하철역에서 친구들 만나기로 했어요.”

두 사람은 잘 다녀오라고, 잘 다녀오겠다고 짧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서정과 서윤은 조용히 아침을 먹고 학교가 먼 서정이 먼저 집을 나섰다. 서윤은 그릇들을 치우고 밥상을 닦아서 한쪽에 잘 세워 놓은 뒤 책가방을 메고 나갔다. 씽크대에 메모를 하나 남긴 채…….

- 엄마 깰까봐 설거지를 못 했어. -

그렇게 식구들의 배려 속에 엄마는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을 잊고 늦게까지 잘 수 있었다.

그 해 봄에 강철이 드라마에 출연했다. 드라마 출연 경력이 전무한 신인에게는 파격적인 주연급 조연이었다. 드라마 예고편이 처음 방송을 탔을 때부터 인터넷은 이강현에 대한 얘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서정이네 식구들도 드라마가 시작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드라마 첫 편이 방송되던 날, 아마 서정이네와 강철이네 식구들을 비롯해 강철을 아는 동네 사람들 모두 TV앞에 앉아있었을 것이었다. 드라마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서정은 기억하지 못했다. 강철이 했던 대사, 손짓, 표정들만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었다.

다음 날 서정은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열었다. 강철에 대한 기사들이 상위권에 떠 있었다. 서정은 포털사이트마다 돌아다니며 강철에 대한 기사를 거의 모두 읽었다.

혹독했다.

연기 경력이 없는 신인에게 너무 큰 역할을 줘서 부작용이 크다는 얘기들이었다. 댓글들은 더 가혹했다. 소속사가 힘이 세서 저런 애를 끼워 팔기로 캐스팅에 밀어 넣었다는 둥, 스폰서가 있을 거라는 둥, 드라마 곧 망할 거라는 둥……. 가끔 강철의 팬들이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응원의 글을 올려놓기도 했다. 이후로 드라마에서 강철의 분량은 점점 줄었다. 강철의 분량이 줄수록 시청률은 올라갔다. 마지막 회 시청률은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지만 강철은 조용히 사라졌다. 드라마가 끝나고 한 달 후 서정은 엄마에게서 강철이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종이 (3화) - 과거 이야기 유리종이

 



서정이 3학년이 된 어느 봄 날.

우연히 강석을 만난 건 강철을 만났을 때처럼 휴게실에서였다. 이번에도 강석이 먼저 아는 체를 해주었다.

 

? 누나, 나도 그거 사줘.”


매점에서 방금 산, 아직 뜯지도 않은 김치라면을 들고 가는 서정의 팔을 낚아챈 강석의 말이었다. 강석의 얼굴을 본 순간 서정은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강철을 봤을 때의 그 놀라움을 또 느껴야 했다. 하지만 강석은 확실히 달랐다. 서정의 뇌가 얼어붙지도 입이 굳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어제 본 것처럼 금세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동네 동생이 바로 강석이었다.

 

아이, 깜짝이야!”

 

어른은 깜짝 안 놀랐어? 히히!”

 

강석은 언제나처럼 실실 거리는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그런 말, 너무 춥거든?”

 

서정은 오랜만에 만난 동네 동생과 사이좋게 김치라면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건물 밖 벤치에 앉았다.

 

서민이 형은 서울대 갔다며?”

 

너네 형은 떨어졌다며?”

 

우리 형이야 원래 대학 같은 거 흥미 없던 사람이니까.”

 

너는 대학 같은 거에 흥미가 있냐?”

 

쪼오금. 우리 집에서 대학에 제일 흥미 있는 사람은 엄마지.”

 

그렇지.”

 

전교 1등을 밥 먹듯 하던 서민은 모두의 예상대로 서울대에 들어갔다.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과외까지 받아가며 공부하던 강철은 서정의 예상대로 떨어졌다. 서정이 보기에 강철은 공부만 마지못해 한 게 아니었다. 원서를 쓸 때에도 엄마가 사다 주는 원서를 마지못해 썼다. 강철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아니었음에도 강철은 엄마의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듣기 위해 그냥 썼을 뿐이었다.

 

대학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으면 1학년 때부터 국영수를 죽어라 파라.”

 

서정은 말을 하면서도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난 대학에는 흥미가 있는데, 공부에는 통 흥미가 없어서 말이야.”

 

앞으로 3년 동안 엄마 잔소리 덜 들으려면 공부에 흥미를 좀 가져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서정은 강철이 요즘 뭘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을 꾸역꾸역 삼켜 내렸다.

 

형처럼 안 되려면 나도 공부를 좀 해야겠지?”

 

형이 왜?”

 

서정은 이때다 싶어 냉큼 물었다.

 

집 나갔어.”

 

뭐어?”

 

이건 서민한테서도 못 들은 얘기였다.

 

배우가 되겠대.”

 

서정은 귀를 판 지가 오래 되었나 싶었다. 서정이 자기 귀를 의심하며 입을 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 강석은 서정이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자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생긴 것만 가지고 배우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치? 그런데 그 인간, 엄마가 재수학원 끊었다고 하니까 학원 영수증 들고 나가더니 이틀 만에 돌아와서는 그거 환불받아서 배우 학원 끊었다는 거야. 20년을 키운 자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엄마 아빠가 20년 동안 꾹꾹 참아왔던 성질을 한꺼번에 쏟아냈지 뭐. 그래서 형이 집을 나갔어.”

 

8년을 알아 왔던 강철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서정의 놀라움이 이 정도인데, 거의 20년을 키운 자식의 새로운 반항기를 접한 부모의 충격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8년 동안 봐 왔던 강철의 모습들이 서정의 머릿속에 흘러 지나갔다.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대화 할 때 빼고는 항상 사람을 외면한 채 먼 곳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분식집에서 주문을 할 때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처럼 친하지 않은 사람과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언제나 옆에 있던 서민이 나섰다. 계산을 할 때도 서민이 얼마씩 내라고 하면 돈을 꺼내 서민에게 주었다. 서정은 한 번도 강철이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내성적인 강철이 집을 나가 재수학원에서 환불을 받고 연기 학원을 등록했다니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머릿속에 그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서정이 연기학원을 등록하는 강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서정은 서방 졸업하자마자 바람이네. 자알 생긴 신입생이랑.”

 

지난 2년 내내 서정을 괴롭히던 강민주였다. 중학교 때부터 강철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했는데 항상 무언의 거절을 당해오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강철과 친한 서정을 보고 질투에 눈이 뒤집혀 알게 모르게 서정을 괴롭혀왔었다. 보이는 곳에서는 소재란과 그 일당의 눈이 무서워 가만히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테러가 저 애의 소행으로 짐작 됐었다.

 

시동생, 시동생.”

 

민주 옆에 있던 애가 민주의 귀에 대고 떠들었다.

 

이강철 동생이야?”

 

민주가 옆에 있던 친구에게 물었다.

 

어이, 거기 불만 많아 보이는 언니! 나는 이강철 동생이 아니라 이강석이야.”

 

강석이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하자 민주는 강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조용히 갔다.

 

서방? 시동생?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강석의 물음에 서정은 한숨부터 쉬었다.

 

에휴! 내가 이렇게 산다. 나야말로 학교를 나가던가 해야지, !”

 

강석은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머릿속에 수많은 가설들을 떠올렸다.


서정의 고3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학년 초 강석을 만나 강철의 소식을 들은 게 어제 같은데 벌써 반소매 교복을 입고 다닐 때가 되었다. 학교에서 가끔 강석을 만나기는 했지만 강철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강철의 소식이 궁금해도 서정은 선뜻 물어보지 못했다. 강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게 너네 형은 뭐하고 사냐?’하고 한마디 툭 던져볼 수 있었을 텐데, 강철을 향한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강석에게도 서민에게도 강철에 대한 궁금증을 한번 도 내비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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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온 서정은 앉아서 닭죽을 후룩후룩 먹고 있었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각에 뭔가를 먹고 자면 아침에 퉁퉁 부어 있을 거라는 통설은 이 시간에 들어와서도 두세 시간 더 공부하다 잘 서정에겐 안 통했다. 늦게까지 공부하다 온 딸이 혼자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안쓰러워 서정의 맞은편에 같이 앉아 TV를 보던 엄마가 갑자기 !”하는 외마디 소리를 냈다. 서정은 오른손에 닭죽이 가득한 숟가락을 든 채 반사적으로 TV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훤칠한 남자가 혼자 여러 명의 남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주먹질이며 발길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긴 다리를 쭉 뻗어 상대방의 얼굴을 후려치고, 큰 키와 긴 팔을 이용해 또 다른 상대방을 잡아채 다리를 걸어 공중회전을 시킨 후 땅바닥에 쿵 자빠뜨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한 손으로는 방금 자빠뜨린 사람을 누른 채 앉은 자세에서 무릎 꿇지 않은 다리를 쭉 뻗어 달려오는 또 다른 상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곧바로 벌떡 일어나면서 점프해 이단옆차기로 뒤에 따라오는 또 다른 상대를 다운시켰다. 곧이어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속속 도착하더니, 마지막 장면에선 정장을 입은 남자가 옷을 두어 번 툭툭 털고 앞뒤로 옷매무새를 확인하고는 카메라를 향해 한번 씩 웃어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갈 길을 향해 경쾌한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남자의 뒤쪽 멀리서는 경찰들이 흠씬 두들겨 맞은 남자들을 일으켜 세워 연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김이 잘 안가고 활동성이 좋다는 내용을 담은 캐주얼 정장 광고였다.

광고에 홀린 서정은 숟가락을 든 손이 기울어지는 것도 몰랐다. 닭죽이 숟가락을 타고 서정의 손으로 흘렀다.

 

엄마, …….”

 

서정이 미처 끝내지 못한 말을 엄마가 마무리 지었다.

 

, 강철이네!”

 

경찰에 잡혀갈 만큼 나쁜 짓을 한 남자들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준 정장 차림의 남자는 강철이었다.

그 한 번의 광고가 학교에 일으킨 파란은 엄청났다. 다음 날, 학교는 온통 이강철 얘기로 들썩였다. 쉬는 시간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강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단순히 우리 학교 출신의 잘 생긴 청년이 TV 광고에 나온다.’ 정도가 아니었다. 강철은 예명인 이강현이란 이름으로 인터넷 포털 검색순위 1위를 차지했고, 그 주 주말에 하는 지상파 3사의 모든 연예 보도 프로그램에서 이강현에 대한 얘기를 다뤘다. 그만큼 강철의 첫 인상이 강렬했던 것이었다.

그 후로 강철이 나오는 TV광고가 점점 늘었다. 서정이 졸업할 때쯤엔 강철에게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강철이 나오는 광고가 하도 많아서 TV틀면 나온다.’라는 뜻이었다. TV광고가 많아지는 만큼 마트에 붙어있는 포스터에서도 지나가는 버스의 옆면에서도 음료수 병에서도 대형 건물 옥상에 있는 옥외 광고판에서도 강철의 얼굴을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광고 이외의 것에서는 어디서도 강철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인 배우라면 대중에게 얼굴 도장 한 번 더 찍어보려고 인터뷰, 예능, 교양 프로그램의 패널 등 얼굴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가는 게 당연할 텐데 강철의 얼굴은 광고 외에는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도 서정은 강철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수능을 치르러 가던 날 강철과 함께 버스를 탔다. 가방 안에서는 강철이 서정의 음료수를 품고 있었다. 수능을 마치고 나와 친구들을 기다리던 커피숍엔 강철이 서정을 향해 커피를 내밀고 있었다. 친구들과 지나간 거리의 빵집에는 강철이 환하게 웃으며 합격을 기원한다고 말해주었다. 강철의 옆에는 합격 기원 초콜릿 세트가 쭉 늘어서 있었다. 비록 광고 속의 강철이지만 서정은 강철이 가까이 있어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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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3월 서민이 입대했다. 대학생을 둘이나 공부 시킬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에 서정을 위해 서민이 휴학을 한 것이었다. 서윤은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윤도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이름 있는 상고에 들어갔다. 졸업만 하면 취업은 무조건 된다는 학교였다. 서정은 수도권에 있는 이름 없는 학교에 입학했다. 서정이 성적대로 지원했다면 서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일류대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서정은 낯선 이름이 붙은 원서를 사들고 와서 선생님에게 내밀었다. 집안 형편 이야기를 하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라고 선생님을 설득했다. 실제로 서정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학교는 수능 성적이 특별히 좋은 학생들은 한 학기 평점 3.0 이상만 받으면 다음 학기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재학 기간 4년 내내 받을 수 있는 특전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선발해서 학교 이름을 높이려는 일종의 장학금 마케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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